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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지식

인조시대의 변란 이괄의 난

by 似而非分析家 2023.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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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조선의 정세는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은 자신들의 부귀영화만을 위해 삼삼오오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괄의 난'은 이러한 서인들의 계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게 됩니다.  상세히 알아봅니다.

이괄의 난 진행도
출처 : kmji98님의 네이버 블로그, 이괄의 진격로

 

이괄의 난의 원인

논공행상에 대한 이괄의 불만?

 

이괄의 난은 1624년 1월(인조 2년)에 인조반정 공신파인 서인 간의 이권다툼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입니다. 인조는 등극한지 1년도 안 돼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신세가 됩니다. 

 

인조시대의 혼란과 왕이 무릎을 끓고 청에 사과한 삼전도의 치욕으로 이어진 이괄의 난이 인조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대한 이괄의 불만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는 사관들의 평은 맞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이괄의 불만 때문이 아니라 서인들의 세력 다툼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괄이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조의 신임 때문이었습니다. 

 

북방 후금의 위협에 대비한 인조의 결정

 

이괄은 본래 병마절도사로서 북방을 지키는 무장이었습니다. 김류의 적극 추천을 통해 한성에서 벼슬을 하게 된 것일 뿐 처음부터 인조는 북방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은 이괄 뿐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괄이 세력에서 밀려 북방으로 갔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감안하지 않은 사관들의 통평입니다. 누루하치가 후금을 일으켜 명의 요동 지방을 함락시키고 조선에 위협을 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비변사가 후금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며 이괄을 변방 방어를 위해 파견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인조가 이를 받아들여 이괄에게 1만 5천 명의 대군을 내려  방비에 임하게 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외직으로 쫓겨나면서 이괄이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는 사관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인들의 북인 말살 작업

 

이괄이 변방 수비에 몸을 아끼지 않고 힘을 쏟고 있는 동안에 서인들은 이괄이 변방에서 1만군을 지휘하고 있는 틈을 이용 북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1624년 1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은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그리고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이시언 등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인조에게 고하게 됩니다. 이들은 한때 광해군과 친분이 있었지만 인조반정 때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란으로 집권한 인조는 역모에 대해 예민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괄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 서인들의 고변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고 엄중한 조사를 통해 이들의 고변이 무고임을 밝혀 냅니다.

 

이괄 아들 이진의 국문 결정

 

이괄 등의 반란 계획이 무고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세력은 이괄을 부원수직에서 해임하고, 중앙으로 소환하여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조는 이괄을 국문하는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한명련 등을 중앙으로 압송하여 국문하는 것으로 집권세력과 타협을 하게 됩니다. 기자헌 등 역모 혐의자 40여 명의 중앙 관료들은 하옥을 시키게 됩니다.

서인들의 모함
출처 : 네이버 웹툰<칼부림>, 이괄의 압송을 구하는 서인

 

아들 이전을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가 영변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에 이괄이 분노는 하늘을 찌러게 됩니다. 나라를 위해 변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자신과 충신들을 역모자로 몬 서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 이진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킵니다. 또한 자신과 함께 역모 혐의로 한성으로 압송되던 한명련을 구출해 반란 세력에 합류시키면서 세력을 확장합니다.

 

이괄의 난

 

한명련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 아래에서 큰 전적을 올린 무신으로 용병력이 출충하고 무술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최전방에서 순변사로 재직하다가 불시에 원인 모를 압송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한명련을 합류시킨 이괄은 자신에게 항복하여 수하가 된 왜병 포로 100명을 선봉으로,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하여 도성으로 진격합니다. 이 정변이 이괄의 나입니다. 1624년 1월 22일 인조 즉위 10개월 만의 일입니다.

 

한성에 도달하기 까지 세 번의 큰 전투

첫 번째 전투

이괄의 반란군은 별다른 방해 없이 한성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철저히 샛길을 통해 진군을 했기 때문에 황해방어사나 경기방어사의 부대도 그들의 진군을 정면으로 막지 못했습니다.

 

진압군과 처음으로 접전이 이루어진 곳은 황해도 황주였습니다. 정부군의 수장은 이괄과 절친이었던 정충신과 남이홍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괄은 가능한 한 정면돌파를 피해서 기습돌파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괄은 대승을 거둔 후 도성을 향해 진군을 합니다.

이괄의 진군
출처 : 네이버 웹툰<칼부림>, 빠르게 진군하는 이괄

 

이괄이 이렇게 도성 진입을 서두른 것은 도성에 살고 있던 가족들 때문이었는데, 결국 아내와 동생 이돈응 관군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전투

두 번째 전투는 개성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평산에서 벌어졌습니다. 관군은 여울을 경계로 삼고 이괄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잠복 정보를 입수한 이괄 부대의 급습을 받고 대패했습니다.

 

세 번째 전투는 임진광 나루터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괄은 한명련의 수훈에 힘입어 관군을 대파하고 벽제로 진출하게 됩니다.

 

임진강 전투에서 관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와 서인세력은 옥에 갇혀 있던 수십 명의 대북 세력들을 모두 처형시킨 후  한성을 버리고 서둘러 공주로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한성에 도달한 이괄의 군대

이괄 부대는 마침내 한성에 도달합니다. 출군 19일 만인 2월 10일이었습니다. 태조 이성계 이후 역사상 반란군이 도성을 점령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이괄은 우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한성을 점령한 자신의 군대가 승리하였음을 고하고,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수도 한양을  내어준 관군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지만 이괄이 한양에 입성하여 인조를 생포하고자 하는 계획이 실패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조 일행을 추격할 생각은 않고 한양에 머무른 것 자체가 스스로 관군의 포위를 자충 하는 악수가 됩니다.

이괄의 난 정충신
출처 : 네이버 웹툰 <칼부림>, 이괄의 진군 경로를 정확히 예상하고 있는 정충신

 

안령(무악재) 전투 대패

전쟁은 2월11일 묘시(5~7시)에 펼쳐집니다. 수적으로는 열세인 관군이지만 안령의 높은 곳을 점령하고 있었기에 열세인 전력을 극복하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관군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자 이괄은 부상당한 한명련과 패잔병을 이끌고 도성을 간신히 빠져 나가 이천에 도달하게 됩니다. 2월 15일 이천에 도착한 반라군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라 전세를 회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이괄의 부하 장수인 기익헌, 이수백에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이들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투항하면서 이괄의 난은 끝이 나게 됩니다.

 

이괄의 난의 후폭풍

 

이괄의 난은 두 가지 새로운 기록을 남깁니다. 조선 역사에서 한성과 경기도가 아닌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한성을 점거한 유일무이한 반란입니다. 또한 도성을 점거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도 실패한 유일한 반란입니다.

 

난은 평정되었지만 내부 반란으로 왕이 쉽게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자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북쪽 변방에 나라의 큰 구멍이 생긴 것입니다.

정묘호란 진행도

 

이괄의 난으로 변방의 주력 부대가 상실되어 북방 수비가 허술해 졌고, 이는 후금의 침략욕을 자극시켜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괄의 난에서 패한 일부 군사는 후금에 항복을 하는데  이들이 나중 후금의 조선 침략의 길잡이가 되어 길을 안내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묘호란은 다시 병자호란으로 이어져 왕이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굴역적인 역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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